관상기도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닌가?

munje 2009. 12. 20. 18:28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닌가?

무언의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해당 도입금지


 


본 기사는 박노열 목사의(이하 : 박목사) 편저「관상기도」한울사, 2006/09/01/발행, 42-44쪽에서 발췌하여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는 한국교회에서 도입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박 목사는 관상기도 편저 43쪽에,“(3)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들은 육체적인 황홀함, 환상, 상상속의 말들 등에 대해서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적 작가들은 그런 것들을 얻어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라고 충고한다...그것들이 여행을 방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귀중하기 보다는 골칫거리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바한 현상에 의지하기 쉽다.”라고, 신비주의와 비판을 모면하려고, 관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는 16가지 내용을 열거하여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무언의 관상기도는 직관 경험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인 신적 합일을 추구하는 관상기도를 신비와 분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는 직관경험에 의존한 신비주의 범주에서 분리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직관(直觀, intuition)은“판단·추론 등을 개재시키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일...현상학(現象學)에서는 철학의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직관을 중요시하고 직접적·직관적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스스로의 고찰을 출발시키려고 한다. 즉, 직관의 외부에서 논리적 구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관 그 자체가 성립되는 곳에서 논리적 구조의 소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이 신비한 현상이 아니라는 단정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박 목사는 42-44쪽에 관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16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표현을 한다. 그의 말대로 관상에 해당하지 않는 아래 16가지가 신비한 현상과 신비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가?

1. 관상은 긴장 해소 운동이 아니다.
2. 관상은 카리스마적인 은사가 아니다.
3.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4. 관상은 초심리학의 현상이 아니다.
5. 관상은“영적 황홀경”(spiritual high)이 아니다.
6. 관상은 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실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7. 관상은 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주어지는 진기한 상이 아니다.
8. 관상은 우리가 관상에 차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나 승인의 표식이 아니다.
9.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대안이 아니다.
10. 관상은 어떤 공허함 속에 합병되는 것이 아니다.
11. 관상은 물 한방울이 하나님의 존재의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12. 관상은 변화된 의식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영을 몸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
13. 관상은 고차원의 의식이 아니다.
14. 관상은 고통이나 욕구의 부재가 아니다.
15. 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16. 관상은 하나님을 닮은 선한 상태가 아니다. 라고 한다
.

그러면 관상기도가 신비한 현상을 모면할 수 있는가? 신비주의가 무엇인가? 사전의 의미로서 신비주의는“신(神)이나 절대자 등 궁극적 실재와의 직접적이고 내면적인 일치의 체험을 중시하는 철학 또는 종교사상.”으로“신비(mystic)라는 말은 눈이나 입을 닫는다는 뜻의 그리스어 myst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성적(理性的) 인식에 의하지 않고, 자연적 능력을 초월한 어떤 형태로 직접 신에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과 관상을 정의한,‘리차드 포스트’는 관상기도가 박 목사의편저 16.17쪽에“관상기도를 무언의 기도라 했고,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집중이다...무언의 기도 목표는“하나님과의 연합”24) 이라고 한다.
“장신대 유해룡 교수는“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직관 경험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신비주의 개념인 절대자 신과의 직접이고 내면적인 일치를 체험하는 초월적인 경험을 위하여 눈이나 입을 닫는 것으로 신비라는 말에 관상기도가 해당하고, 이를 체계화한 관상기도가 종교사상이라는 점에서 신비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16가지 소개하는 내용을 살펴서 비교하면 일관성이 없어서‘이리저리 마구 찌르고 부딪침’으로 좌충우돌(左衝右突)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관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는 16가지를 제시하는 것은 독자에게 신비주의를 모면하려는 차별화 대안의 전략에 일환으로 머리를 혼란케 하는 억지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사실인즉 위에서 제시한 16 가지를 제외 분리하고, 진정 관상에 이르는 기도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관상기도가 신비주의 사전적인 의미에 해당하는 한, 16가지 현상은 불가피한 것인즉 이를 수용하여 체계화를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라 여긴다. 그 무엇이라 변명을 하여도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이다. 따라서 신비한 상태가 아닌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것은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비주의 개념에 관상기도가 적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언의 관상기도 프로그램 적용으로 가시적인 변화가 있다손하더라도 이는 성령님에 의한 인격의 내외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 도임을 금함이 가톨릭의 수련 수도원화나 이방종교의 관상 만트라(진언) 행위의 침투 예방에 최선이요, 기독교의 건전한 교회 유지를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이단대책협회
상임회장 원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