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승우 (큰믿음교)

변승우씨 상반 이중성 합리화

munje 2009. 2. 24. 23:22

 

 

변승우씨 상반 이중성 합리화

어긋난 두 명제(命題) 문장 서로 모순 주장 불성립
http://www.chptp.org/













변승우 목사의(이하 : 변 목사) 모순 주장 불성립에 인식을 살펴본다.
이 부분에서 변 목사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꿈과 환상과 예언을 터부시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전제하에,
오늘날 교회를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시각에서,
변 목사는 하나님, 계시, 성경에 대하여 상반논리 합리화에 사로잡혀 있다.
이로 말미암은 원인을 제공, 변 목사는 비판 받음을 자초한 것이다.

사실 변 목사의 문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 같으면서,
전체적인 틀에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서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상반[相反] 어긋나 양립할 수 없는 헷갈리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도적이든지 아니든지 진실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함이 문제이다.

변 목사는 극단신비주의로서 기독교형의 무속화에 입문한 분이다.
이것이 기독교 사회는 물론 민간 영역에 미치는 해악은 심각한 것이라 본다.

사실 아래 인용한 변 목사의 주장은
자의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횡설수설[橫說竪說]이다.
이는 조리가 없이 이러쿵저러쿵 혼란케 지껄이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경의 '진정성(眞正性)' 참된 성향을 이탈,
진리의 체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에 사로잡혀서(꿈과 환성과 예언) 이를 주장하는 것은
가상(假象) 스러운 것이다.
이것에 변 목사는 목숨을 건 분이라 여겨진다.

이 자체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가시적인 행각들이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는 허상 때문일 것이다.
이는 성경을 잘 못 인용하여 자의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이들이 이 결과를 진리인 것으로 주장하는 하는 것은
성경을 이용하여서 어긋난 모순을 믿게 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제 변 목사가 제기한 문제의 내용에 대한 성경적 비판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1. 변 목사의 원인제공 내용.

변승우 著 <대부흥이 오고 있다>, pp.243-246에,

《“오늘날 교회 안에는‘말씀 말씀’하면서 꿈과 환상과 예언을 터부시하는 종교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성경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랑하기보다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자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대적한 것처럼 이들은 우리를 찾아오신 성령님을 대적합니다...정말 요즘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성령님이 아니라 성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성령님을 예수님이 소개한 대로 진리의 영 혹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 혹은 광신도나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7.06.12 13:40 http://blog.daum.net/bs_chunsa/12511324)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 (엡1:17)
바리새인들이 성경은 많이 알았으나 하나님을 몰랐다
오늘날도 신학자들이 지식적으로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으나 계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신학자들도 있다..목회자들도 교회 안에서 말씀, 말씀, 말씀을 배우는 쪽으로는 나가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터부시 하느냐,,하나님을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안다..그러나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구하라 했다..지혜와 계시는 영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지혜와 계시가 온다..성령만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계시를 주신다

1) 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바라야 하는가?

보통은~ 지혜하면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을 떠오른다..
계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떠오른다.
지혜와 계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성경에 대한 해석을 알려 주시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사도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에 대해서 단순하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지혜와 계시의 영을 왜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한다..<요10:3>영생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하나님)자신을 아는 것이다..그것이 영생이다..그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마11:27>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계시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하나님을 아는 자가 구원받은 자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에 갈수 있는 자인데, 계시를 받는 자만 아버지를 아느니라
성경을 잘 알고, 가르치고,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거기에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계시가 있어야 한다..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지혜와 계시가 있어야 한다..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것이다..이 계시의 근원이 성령님이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아니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성령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잘 알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이 나타나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다..성경을 가지고도 몰랐다
이 세상 지혜로 관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신 것을 알지 몰랐다..사람의 모습만을 본 것이다
바울이 나중에 핍박하다가 알게 되었다~성령이 그에게 임하므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성령님이 지시는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렘31:31~34-새언약(=복음)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 준다
나 여호화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느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나는 그들의
내 백성이 될 것이라........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며 다시는 그들의 죄악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내 법을 그들의 생각,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그들의 죄를 사하여 준다고 하셨다
아무나 죄를 사하여 준다고 하지 아니하였다..생각에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사람
돌 판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외부로부터 명령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명령이 내부로 부터 소원이 되어서 내 마음의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서..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는 것~거듭납이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느니라..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계명되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일으켜 준다.
하나님의 법이 생각과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고 불법을 기억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새언약은 회개하고 예수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이 내 생각과 마음에 기록될 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어서 그래서 내 죄가 사해지고, 내 불법이 사해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이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천국에 갈 자들이다
계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성경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뜻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요엘~말세에(신약시대 때에는)
내가 내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하나님을 아는 것(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절적으로 인식되는 것..직접적으로 아는 것~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다..그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고 기도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0^
보고 안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영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생활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면 그분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령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성령이 충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거룩)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면,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이 생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적인 거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 하였다.
진짜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영광,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 죄를 깨닫고 죄를 갑작스럽게 인식하게 되고, 깊은 회개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간구하게 되고 정결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영생이 아니다..교회를 말 한다~지옥..이것은 천국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요일2:3~4>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여길 것이다~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느니라.. 변승우목사님》

위 내용을 정리하면 변 목사는 상반이 되는 주장을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사람은 이러한 주장으로 헷갈리게 만들지 않는다
.

변 목사는“요즘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성령님이 아니라 성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계시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아니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성령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계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성경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2. 비 판.

1) 요즘 교회는 삼위일체가 바뀌어 성령이 성경이 되었는가?.

변 목사는‘요즘 교회는 삼위일체가 바뀌어 성령이 성경이 되어 버렸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에 편승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정통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제3위 성령님을 성경으로 바꾼 사실이 없다.
정통 기독교의 성도는 성령님의 은사와 기능에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변 목사와 같이 성령님이 성경이 되었다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문자해석의 잣대에서 피할 길이 없는
비성경적인 신비주의자들의 궁여지책에서 비롯된 성령이 성경이 되었다는 비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신비 은사주의 경험을 비성경적인 논리 체계로,
성경을 짜깁기하여서 성경적인 권위를 두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이 보장하지 않는 육감, 예감, 환상, 환청, 꿈의 지시 등에
어떤 현상을 성경 형성시 직접계시의 시대와 동일하게 성경의 권위를 갖는
영감계시의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광신적인 신앙출발에서 오는 경향으로 극히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이 독자의 판단력을 무감각하게 하여서
체험(경험) 우선의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상이나 현상의 도입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개혁은 성경 바탕에서 문자해석을 기본으로 한다.
16세기에 극단적인 신비 우화주의 경향으로 가톨릭의 부패가
극치를 달릴 때에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긴다.
이 시대는 비성경적인 신비주의 상징과 우화가 판을 치는 암흑시대이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이 삼위일체가 바뀌어 성령이 성경이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성경을 제일로 하는 기본 잣대가 없으면 개혁은 불가한 것이다.
변 목사의 말과 같이 종교개혁을 폄하 삼위일체 제3위의 성령님이 바뀌어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은 성경을 이탈한 극단적인 신비주의 너울을 벗기고,
성경 본래의 모습으로 성경해석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변 목사와 같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장하면서
빈야드운동 신사도운동, 선지자 학교를(예언) 만들어 적용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것으로 영적인 배후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변 목사의 주장이나 적용이
각 교단에서 경계령이 발효된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변 목사의 말대로 오늘날 교회와 종교개혁이 성령님을 무시 대적,
성령님이 성경으로 바뀐 것이라면 비판의 빌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 안에서 성경 잣대에 따른 종교개혁과
오늘날 정통교회는 말씀 말씀하면서 성령님이 성경이 된 것이 아니다.

변 목사는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종교개혁까지 흠집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자기 주장과 적용이 비성경적임을 들어내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변 목사가 비판을 받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변 목사의 주장이 자신 만만하다면
천국의 도서관에 자기 흐름에 도서만을 소장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두려워서 자신의 말대로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의 도서에 겁을 먹는가?
오히려 상대의 주장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배려하여
더 확신한 상태에 거하게 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는가?
누가 성령님을 비성경적인 자기 합리화로 바꾸어 놓았는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변 목사는
성령님을 비성경적인 신비주의 주장으로 성경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렇다면 누가 종교의 거짓 영에 사로잡힌 것인가?
누가 성령님을 미혹의 영으로 바뀌어 놓았는가?
누가 광신도나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영으로 믿는가?

기독교에서 광신도적인 신비주의를 배타하는 것은
변 목사도 인정하는 바이고,
오히려 변 목사의 주장에 대한 적용에서
적극적으로 광신도 신비주의 경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변 목사는 이것을 합리화시키려고 비성경적인 신비주의 행각을 성경이라 주장,
기독교의 입장을 수호하는 이들을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자로 규정,
이들을 구덩이에 빠치려는 자신의 올무 전략에.
자기 자신이 올무에 걸려서 구덩이에 빠진 꼴이라는 점에서 적반하장이 아닌가?
이는 곧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르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2) 변 목사의 이율배반 문장인용.

변 목사의 문장을 살피면, 이율배반적이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이 되어서 양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이 없음이 문제이다.
이러한 문장은 결과론적으로 합리적인 문장이 아니다.
따라서 이율배반 [二律背反, antinomy]적으로 좌충우돌하는 것이다.
이 증거를 확인하자.

①“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계시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아니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성령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②“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계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성경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위 ①과 ②의 내용은 상반되는 것으로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가 주장하는 문장이 좌충우돌을 하는 것이다.

①의 내용을 살피면.

변 목사는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면서,
성령이나, 성경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니,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는 곧 그의 말이나 행동이
자가당착(自家撞着)으로서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는 모순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계시와 일반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변 목사는 계시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양립하지 않는 결론적인 부정이다.
이는 계시의 원천인 성령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을 무시하는 계시론 자로서 사단의 역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변 목사와 같이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하나님(아버지)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 곧 그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요1:12), 성령으로 예수님을 주시라 함으로서(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따라서 성경 말씀인 특별계시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음에 근거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인 이유를 성령님은 거듭난 속사람인 영과 더불어 일치하는 증거를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예정의 섭리를 따라 거듭난 성도에게
성령님을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이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시는 때이다(고후1:21-22).
고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성령님과 그 관련 계시의 문장인 성경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다.

②의 내용을 살피면.

변 목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단정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는 상호 상반되는 모순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옳은 것 같으나,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니,
전자나 후자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럴싸하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속아는 수법이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가 없음이 당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리에 반하는 그럴싸한 표현은 속임을 전제한 미끼에 불과하다.

변 목사가 신학교 다닐 때에 예언의 계시성에 간증은,
성경해석이 정확하여 틀린 것이 없을 것이며,
주님이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라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변 목사를 향한 선지자 샨 볼츠의 예언에서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 천사 중 직위가 높고 강력한 한 천사가 변승우 목사님 곁에 와 있습니다.
바울이 서신서들을 저술할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천사입니다.”
“그 천사들은 하늘나라에서 계시와 메시지를 가져와
책을 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목사님 곁에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 목사의 글이나 말은 틀린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변 목사의 문장이 앞과 뒤가 맞지 아니하니,
그를 향한 예언의 계시는 성령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변 목사와 관련 예언에서 보여진 직위가 높고 강력한 한 천사라는 존재나,
이 기록을 담당한 변 목사가 영적이지 못함이 들통이 난 것이다.
따라서 이율배반 [二律背反, antinomy]적이다.
이는 서로 모순이 대립하는 두 명제(命題)는 동등한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 아니다.
고로 양립하지 하지 않는 개념의 문장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대립하는 두 명제인 이중구도의 흐름은 영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자가당착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변 목사의 경우를 적용하면, 그의 결과물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나
선한 천사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변 목사의 기록이 기름부음과 천사의 산물인 것으로 주장하니,
진실에 반하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성경계시 종료 이후는
성경해석의 영감시대이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시대이다.
변 목사와 같이 하늘나라의 비밀인 메시지를 천사가 가져와
변 목사에게 기록케 하는 예언을 동의하는 신앙은
성경 66권의 계시의존 사상을 신앙하는 사람이 아닌,
직통계시를(성령이 가라사대)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여기는 행각이다.

사실 변 목사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것이라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을 성경이라 위장한 자의 전략일 뿐이다.
따라서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아니다.
우리가 알 것은 앞과 뒤가 맞지 아니하는 성경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진짜 같이 보이려는 위장의 행각이다.
그리고 성경이 보장하지 않는 신비경험의 비판을
성령의 역사 제한이나 훼방이라고 치부하는 자는
이미 이단이거나 사이비에 입문한 이들이 일반이다.


3. 성경의 교훈.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계시로 완성을 하셨다.
성령님의 계시를 의도적으로 이끌어 내리는 것은,
성령님의 절대주권에 침해요, 성취 할 수 없는 망령된 행위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는 자기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아닌 신사도운동의 예언과 계시의 의도적인 행각은
성령님을 빌미로 사도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으로 불법이다.

계시는 성경 66권에 의존한 것이 건전한 신앙 보장을 받는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깨달아 밝히시고 나타내시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에 가르치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나(마11:27),
지혜와 계시의 영은(엡1:17) 성경66권에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안에서 계시를 의존하는 것이 참된 것으로 건전한 신앙을 보장 받는다.

따라서 성경에 반하는 자의적인 의도로 계시의 영을 운운,
범사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형의 탈을 쓴 무당이나 박수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성령님은 결코 인간의 요구대로 왔다 갔다,
들락날락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은 인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성령님은 죄인을 성도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 순간 하나님은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주심이 복음이다.

▲ 고린도후서 1:21-22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堅固)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印)치시고 보증(保證)으로 성령(聖靈)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 요14:16-17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롬8:14-16 /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어찌 변 목사와 같이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 말이나 되는가?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8-11)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뜻에 반하는 선지자 노릇을 하는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의 계시를 통한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한편,
하나님은 자신을 알만한 것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 속에 보이셨다.
변 목사가 믿는 계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결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상반되는 문장으로 앞과 뒤가 일관성이 없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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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1:19-23 /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알만한 (그노스토스 : 잘 알려진, 아는 / 주격중성단수)
보임 (화네로스 : 분명한, 공개적으로, 외부적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빛나는 / 형-주격중성단수)
-이라 (에스티 : 그는 " "이다 / 동-현재능동태직설법3인칭단수)
이를-보이셨느니라 (화네로오 : 명백히, 명백하게 나타나다, 명백히 선언하다 / 동-과거능동태직설법3인칭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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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창세(創世)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永遠)하신 능력(能力)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萬物)에 분명(分明)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榮華)롭게도 아니하며 감사(感謝)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虛妄)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智慧)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形像)의 우상(偶像)으로 바꾸었느니라

▲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外)에는 아들을 아는 자(者)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所願)대로 계시(啓示)를 받는 자(者) 외(外)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者)가 없느니라

계시(아포칼륌토 :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폭로하다, 밝히다 /동-과거능동태부정사)
아는-느니라 (에피기노스코 :알다, 인식, 전적으로 알게 되다, 인정하다,지각하다/동-현재능동태직설법3인칭단수)
없 (우데 : 여하튼, 도 아닌, 마저 아닌, 아닌, 결코아니다 / 접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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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魔鬼)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慾心)을 너희도 행(行)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殺人)한 자(者) 요 진리(眞理)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眞理)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변 목사의 주장은 앞과 뒤가 맞지 많은 자기 합리화로서,
선지자 노릇의 불법인 요한복음8:44이 적용되는 것이라 본다.


기독교이단대책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