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선교사

“나의 복음”에 관한 소고: 본문 주석을 바탕으로

munje 2018. 6. 30. 21:50



“나의 복음”에 관한 소고: 본문 주석을 바탕으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221306438319


권율목사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묘사할 때, 다른 사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을 하나 사용한다.

그것은 “나의 복음”이라는 문구인데, 그의 서신서에서 정확히 세 번 등장한다(롬2:16; 16:25; 딤후2:8). 참고로, 디모데후서 2장 8절의 우리말 번역은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상으로는 명백히 “나의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이다. 그리고 세 경우 모두 예외 없이 전치사 κατὰ와 결합하여, “나의 복음대로” 또는 “나의 복음에 따라”(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라는 구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 필자가 이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심히 고민한 적이 있다.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그렇지, 바울 자신의 복음(“나의 복음”)이라는 말이 그다지 탐탁지 않게 들렸다. 자기가 다른 사도들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복음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바울 자신만의 어떤 독특한 복음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지 참으로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최근에는 순회선교단의 ‘복음학교’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의도치 않은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합신 교단에서는 이 용어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는 중이다. 그만큼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이 용어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하다 보면 전혀 의도치 않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혼란을 막고자, 해당 본문들을 주석하면서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추적해 보았다.


먼저 “나의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 내용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이것은 “신비의 계시”(the revelation of the mystery)에 근거하고 있다.

사본학적으로 다소 논란이 있는 로마서 16장 25-27절이 그 근거 구절인데, 일단 우리말 번역(개역개정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말 번역으로 봐서는 구문적으로 근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영어 번역(ESV)을 덧붙여 놓았다.

25 Τῷ δὲ δυναμένῳ ὑμᾶς στηρίξαι 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καὶ τὸ κήρυγμα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μυστηρίου χρόνοις αἰωνίοις σεσιγημένου, 26 φανερωθέντος δὲ νῦν διά τε γραφῶν προφητικῶν κατʼ ἐπιταγὴν τοῦ αἰωνίου θεοῦ 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 εἰς πάντα τὰ ἔθνη γνωρισθέντος, 27 μόνῳ σοφῷ θεῷ,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ᾧ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 ἀμήν.

25 Now to him who is able to strengthen you according to my gospel and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that was kept secret for long ages 26 but has now been disclosed and through the prophetic writings has been made known to all nations, according to the command of the eternal God, 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 27 to the only wise God be glory forevermore through Jesus Christ! Amen.

25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 묶여 있는데, 이것은 Wilckens도 지적했듯이 “나의 복음”을 추가로 정의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라는 뜻이다(Moo, Romans, 938). 그래서 “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의 복음”의 내용이 어떠해야 함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은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이기 전에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또는 영어 본문에서 보듯이, “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καὶ τὸ κήρυγμα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바로 다음에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μυστηρίου)라는 구문이 붙어 있다. (물론 우리말 본문에는 번역상의 이유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은 앞의 구문에 종속되는 구조로서 “나의 복음”이 “그 신비의 계시”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바울이 의도하는 “나의 복음”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받은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다(롬2:16). 이것은 2장 처음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는 맥락에서 귀결된 필연적인 결론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엄중한 공의로우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을 바울 자신의 복음으로 표현한 이유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이미 체험하여 더 이상 십자가의 복음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말하는 “나의 복음”은 다윗의 씨로 오신 메시야이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딤후2:8). 평소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고난 받는 메시야, 부활의 메시야에 대한 내용이 핵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행26:23). 그리고 그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 한때 박해했던 ‘예수’라는 인물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이제 바울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이러한 복음을 말하는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뜻으로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398). 그래서 개역개정판에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나의 복음”이 가리키는 총체적인 의미를 정리해야 한다.


일단 세 구절에 나타난 바를 있는 그대로 종합해 보면, “나의 복음”이란, 신비의 계시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며, 또 다윗의 씨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 복음을 말한다는 의미로 ‘나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위와 같은 내용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이라는 측면이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라는 말도 강조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이지만, 그것을 세상에 말하는 주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복음을 담아내는 나의 주관적 체험이 맞물리게 된다. 나의 체험에 따라 복음의 계시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 계시된 복음의 내용을 얼마나 능력 있게 증거하느냐는 나의 주관적 체험에 크게 좌우된다.


복음에 대한 실존적 체험이 빈약한 사람은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내용을 다른 이에게 말하면, 마치 자동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은 바른 복음과 바른 교리를 전하는데도, 왜 회심의 반응을 안 보이냐며 오히려 청중을 탓하기도 한다. 심지어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지금은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자신의 빈약한 복음 체험을 합리화시킨다. 물론 성령의 주권적인 ‘거두심’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많은 경우에는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내용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나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다. 여기에는 나 같은 목사나 신학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


이미 언급했지만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때는 그 복음과 자기 자신이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이전에 그토록 박해하던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자신의 실존이 송두리째 뒤바뀐 체험을 한 이상, 상식적으로도 자기 자신과 복음을 분리시켜 말한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 복음을 말하려면 변화된 자신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고, 또 현재의 자신을 말하려면 십자가의 복음을 반드시 증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두 측면을 동시에 사수해야 한다. 나의 복음“에 따라”(κατὰ)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그것을 의도한다. ‘두 측면을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 복음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와 동시에 바른 복음과 바른 교리를 능력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나의 복음 체험에 날마다 힘써야 한다. 이때 말하는 ‘나의 복음 체험’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실재(reality)로 인식할 수 있는 나의 영적 감각을 키우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내가 사로잡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필자도 사도 바울처럼 “나의 복음”을 말하는 일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증거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말하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온 세상에 전파할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이 허공을 치는 객관적인 진술로 그치지 않고 “나의 복음”이 되도록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2:4)을 힘써 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바울과 같이 “나의 복음”을 일상 가운데 능력 있게 외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협력할 것이다.

나의 복음! 이제 외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