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바른믿음)

십자가만이 구속이다?

munje 2017. 7. 5. 08:42


십자가만이 구속이다?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가 능력 있다는 것을 이교수는 어떻게 확증할 수 있었는가?


교회와신앙 켑처

http://www.chptp.org/news/articleView.html?idxno=135


2017년 2월 23일 오후 2시 총신대학교 제2종합관 카펠라홀에서 100여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 ‘복음주의 포럼’이 열렸었다. 이흥선 교수(총신대 실천연구목회연구)는 ‘복음의 핵심, 부활인가 십자가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한 발제에서 “한국교회 내에서 부활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십자가가 더 중요하냐 또는 부활과 십자가의 비중이 똑같으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바른 의미를 잘 몰라서 생긴 일이다.”면서 “십자가의 의미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고 정의한 후 따라서 보혈(피)은 곧 생명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죄사함, 거듭남, 새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부활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이흥선교수가 주장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중요성과 관계를 크게 요약한다면 

첫째, 구속은 십자가에서 완성됐다. 

둘째,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이다. 

셋째,십자가와 부활은 절대 두 축이 아니며 반드시 십자가 한 축이다. 

신자의 믿음에 있어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십자가만 확실히 믿으면 부활은 따라오는 열매이며 성경은 부활과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신자는 십자가만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넷째, 부활로 십자가를 조명하는 것이 틀린 건 아니지만 십자가로 부활을 조명해야 한다. 뿌리가 십자가이고 여러 가지 열매 맺힌 것 중 하나가 부활이다. 이 교수는 <교회와신앙>과의 인터뷰에서도 “부활은 구속적 사건이 아니다. 십자가가 구속의 사건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 중 하나이다.”면서 “부활은 십자가와 한 몸통이며 열매이다. 부활의 열매는 십자가에 달려진 열매이다. 이 둘을 분리해서 볼 수 없다. 십자가를 믿으면 부활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지 않느냐.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로 완성이 됐다. 구원이 완성되면 재림 때에 자동적으로 부활이 된다. 십자가에 딸려 있는 100% 열매이기 때문이다.”라고 재차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바른믿음 정이철목사와 이흥선교수의 주장은 신자의 ‘믿음’에 있어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독특한 역할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심각한  구원론에 오류로(롬 10:9) 만약 지금도 부활을 몰라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장을 한다면  심각한 반구속적 이단적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이흥선교수가 이런 편협적이고 무지한 주장을 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첫째, 구속의 이중적 개념 부재,  

둘째, 신학의 다양한 ‘관점’ (perspective)이해 부재, 

셋째, 부활을 단순히 십자가를 통해 따라오는 종말론적 신자의 부활로만 보는 부활론에 대한  신학의 부재,  

넷째,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 이해 부족이다.

먼저 필자가 정의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 이다.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는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의 대한 예표 라면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가 예수 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 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라 두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이었다. 이크튀스(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초기 그리스어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즉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이흥선교수는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속죄론적 관점에서만 본 십자가 중심으로 가다보니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반구속적인 사상과 부활을 수많은 십자가의 열매중에 하나로 볼 수 밖에 없는 편협적인 반구속적신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구속의 이중적 개념 부재

바른믿음측과 이흥선교수는 부활은 십자가 대속의 완성의 당연한 결과이며 열매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본 원인은 속죄와 구속에 대한 신학적 개념 부재와 구속의 이중적 개념 부재임을 본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단번에  이루신 것은 속죄사역(atonement)이다. 그리고 속죄의 속전(Ransom:몸값)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피)을 보상의 기초로 한다. 구속(Redemption)이라는 개념은 이중적 개념을 갖고 있는데 죄의 종 노릇으로 부터 구원해 내어 완전한 자유로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만이 가능하다.

1)  구속의 이중적 개념

(1)     Redemption from (‘~로 부터의 구속’)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의로 부터, 죄와 사단 및 모든 악으로 부터의 구속을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4)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

(2)     Redemption for (‘~에로의 구속’) 죄로 부터 새로운 자유,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과의 자녀된 관계, 새로운 생명에로의 구속이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1)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약신학 교수인 리챠드 개핀(Richard B. Gaffin, jr.) 박사 논문 「부활과 구속」에서도 “엄격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닌 그의 부활(즉 승귀)이 단번에 이룬 구속의 성취를 완결 짓는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이신 죤 머레이(John Murray) 박사  “그가 십자가의 의미를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죄가 아직도 초절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정죄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Murray 박사는 본절을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속의 이중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3) 루이스 벌콥(Berkhof)은 “더욱 중요한 일은 구조상의 한 요소인 부활을 구속사역의 핵심, 나아가 복음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4) 브루스 밀른은 부활 사건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실상 그의 아들의 제사장적 사역에 대해 '아멘'을 공표하신 것이다.(고후1:20) 진정한 구속이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의와 화목과 자유가 죄인들에게 진정으로 주어졌다.(롬4:25) 더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혈과 육에 속한 연약한 인간을 저주와 진노와 모든 악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시고 도리어 견실하게 해주신 사실을 본다. 부활은 그의 왕적 사역을 나타낸다. 부활은 그의 미래의 통치에 대한 약속을 구현시키는 사건이다

즉 율법의 형벌, 죄, 사단 및 모든 악으로 부터의 구속과 죄로 부터 새로운 자유 및 그리스도와 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회복을 구속이라고 하며, 구속의 속전 즉 몸 값은  자발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구속사역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사건들이며 부활은 사단의 머리를 부순(crush) 구속의 완성이며 구속의 마침표로 이해할 수 있다. 이흥선교수의 구속개념은 구속의 이중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편협적 구속 성경 신학 사상임을 보게 된다.

신학의 다양한 관점 이해 부재

이 교수는 포럼을 통해 2년여간 목회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발표하면서 십자가와 부활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는 부활이라고 답한 것이 25%로 십자가라고 말한 17% 보다 높았다.라고 한다.

십자가와 부활중에 어느것이 중요한가? 라는 질문은 신학의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가 있는 질문이다.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과 통일성, 이중적 개념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이중적 개념으로 인간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적비밀이지만 이 두  개념이 하나될 때 기독론을 이해할 수 있으며 기독론의 이해없이 속죄론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학의 특징상 어떤 ‘관점’(perspective)을 정의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 중에 어느것이 중요한가? 라는 질문은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독특한 특징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질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중요성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 중에 어느것이 중요한가? 라고 했을 때는 당연히 십자가이다. 기독론의 관점에서 예수의 신적 정체성 즉 예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부활이다. 반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이다. 성화론적 관점에서 신자의 삶의 헌신과 태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종말론족 신자의 소망과 구원은 부활을 통해서 확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전혀 다른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구속의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동전양면처럼 떼레야 뗄 수 없는 전혀 상반된 개념이 동전처럼 하나가 될 때 동전의 본질을 가질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도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중요성은 동전양면처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부활론에 대한 편협성과 이해부재

 현재 이교수의 오류는 복음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핵심을 그리스도론으로 보지 않고 속죄론적 관점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구속의 불균형이 생기는 것이며 부활사건이 주는 독특한 기능과 의미를 여러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종말론적 신자의 부활의 개념과 단순히 영적 의미로만 이해하다 보니 부활을 구속적 사건으로 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교수는 부활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따라서 보혈(피)은 곧 생명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죄사함, 거듭남, 새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부활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부활과 십자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활이 피(십자가)를 만드는가?, 아니면 피가 부활을 만드는가? 라는 명제아래 피가 부활을 만들지 부활이 피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이교수는 부활은 죄사함, 거듭남,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교수의 주장은 부활과 십자가의 관계를 속죄론적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부활이 피를 만드는가? 피가 부활을 만드는가? 라는 편협적이고 황당한  명제를 만들어 부활이 구속적 사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수는 부활을 구속론적 관점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로 보는 반면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콥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부활이 주는 의미를 기독론 관점을 통한 속죄론에 대해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거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요나의 표적)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이셨음 (롬1:4)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것은 또한 영생의 사실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속 사역의 핵심. 따라서 복음의 핵심에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위대한 기초석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효력을 기지려면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종결 되어야 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천부의 추인이자. 그것을 열납하셨다는 공적 선언이었다. (루이스 벌콥프 조직신학 합본 P. 583~585)

필자의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신자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될 때 이 피가 효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보배 피가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피이기 때문이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루이스 벌콥프교수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이해 부재

또 이 교수는 또 “십자가와 부활은 절대 두 축이 아니며 반드시 십자가 한 축이다.

나무로 비유하면 십자가는 뿌리에 해당되고 십자가로 맺혀진 여러 열매들 중 하나가 부활이다. 그렇다고 십자가와 부활이 절대 분리가 아니며 뿌리와 열매는 한 몸이다.”

이 교수는 “부활로 십자가를 조명하는 것이 틀린 건 아니지만 십자가로 부활을 조명해야 한다. 뿌리가 십자가이고 여러 가지 열매 맺힌 것 중 하나가 부활이다.”면서 “한국교회가 이 부분이 조금 미흡해서 이 부분을 강조했다. 부활은 여러 열매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부활이 이뤄진다. 십자가가 아니면 부활이 이뤄지지 않는다. 부활은 십자가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이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부활을 십자가로 맺혀진 여러 열매들 중에 하나가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이교수의 뿌리와 열매의 비유는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논리와 설득력이 떨어 지는 비유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뿌리와 열매 비유는 십자가와 부활의  일체성은 어느정도 설명이 되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각기 다른 기능과 다양성이라는 부분에서는 납득하게 힘든 비유이다. 이교수의 주장처럼 단지 부활은 십자가를 통한 새생명, 거듭남이라면 거듭남과 새생명을 통해 오는 신자의 인격적 변화인  즉 겸손, 섬김, 사랑, 헌신, 낮아짐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온유와 겸손은 부활에서 오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신자의 성화론적 관점에서 뿌리가 아닌 열매로도 작용할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열매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믿음으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한 예수의 주되심의 선포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동행을 통해 나타나는 신자의 삶의 변화가 구속의 열매라고 할 수 있고 구속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 회복이다. 

부활로 십자가를 조명한다는 의미는 신자의 믿음의 근간이며 모든 성경 말씀의 확증이며 부활로 확증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은총과 십자가의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 중에 하나가 아닌 기독교의 근간으로 기독교의 시작은 부활의 충격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부활은 예수의 하나님되심의  최고의 증거라면  십자가는 대속의 은혜에 최고의 자랑이다. 판넨베르크교수의 주장처럼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흥선교수에게 한가지만 질문하도록 하겠다.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가 능력 있다는 것을 이교수는 어떻게 확증할 수 있었는가?

결론적으로 이흥선교수의 주장은 구속의 이중적 개념 부재,신학의 다양한 ‘관점’ (perspective) 이해 부재, 부활을 단순히 십자가를 통한 따라오는 종말론적 신자의 부활과 영적의미로만 보는 부활론에 대한  신학 부재,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 이해 부족의 결과임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이흥선교수 같은 편협적인 구속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전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 일부 신자들이  가장 본질적인 기독교의 복음을 잃어 버린 결과로 부활사건을 통해 확증된 믿음이 아닌 십자가만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적 믿음에 근거한 결과로 율법적이고, 교리적인 신앙을  낳게 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성경신학적인 바른 표현이며 구속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예수의 주되심의 고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즉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 중에 하나가 아닌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동전양면처럼 떼레야 뗄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연합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다.

 

2017년 6월 10일

애틀랜타 뉴에덴침례교회 이재위목사

이재위  ksbcameric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