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 (풍성한교회)

두날개는 거짓방언으로 크게 미혹했어

munje 2015. 4. 28. 20:50



두날개는 거짓방언으로 크게 미혹했어

전인적 치유수양회 분석(4회)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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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두날개 국제컨퍼런스' 장면. 미국,일본,러시아,중국 등의 해외의 목회자들도 많이 참석했다고 두날개 측은 밝혔다.

뱀이 삼킬 먹이를 칭칭 감아서 잡는 것처럼 지금 뱀 같은 사탄이 많은 영혼들을 칭칭 감았다. 그러나 마귀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았던 귀신처럼 무섭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특히 마귀는 현대의 교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는 ‘광명의 천사’로 활동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현대 교회에 다가오는 광명의 천사가 교인들에게 주는 가장 대표적인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참 기독교의 방언을 모조하는 마귀의 거짓 방언이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3,14)

사도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 고린도교회에 다가와서 신자들의 신앙을 더럽힌 사람들을 ‘거짓 사도’, ‘궤휼의 역군’, ‘광명의 천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박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 구나.”(고후 11:4)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궤휼의 역군들로부터 원래 바울 자신이 그들에게 전하지 않았던 미혹의 영, 복음처럼 들리는 사탄의 사상, 성령처럼 위장하는 귀신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구체적으로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어떤 것들이 거짓 영의 열매였을까? 많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으나, 사탄이 고린도교회에 주입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골치아픈 것은 거짓 방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었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정상적인 성령의 방언이었고, 단지 신자들이 그것을 오용하고 남용하여 교회가 더렵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성령으로 위장하는 거짓 영들이 일으키는 방언이 어찌 기독교의 성령의 은사이겠는가? 교회를 더럽히고 신자들이 귀신과 짝하게 만드는 사탄의 종자들이 일으키는 방언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시는 방언과 같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순진했다.

당시 고린도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귀신의 거짓 방언의 홍수로부터 신자들을 구출해내기 위해 바울은 기독교의 참 방언에 대해서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고린도의 신자들이 성령이 주신 정상적인 방언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현상을 교정하기 위해 쓰여진 내용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더 많은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목사들도 그 관점에서 고린도전서를 보고 있다. 그러니 귀신의 거짓 방언을 추방하기 위해 쓰여진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관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제4과: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라(3회)

김성곤 목사는 두날개의 전인적 치유수양회 제4과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라’에서 방언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쳤다. 내용을 보니 거짓 성령운동가들이 흔하게 강조하는 내용들이 두날개의 전인적 치유수양회의 김성곤 목사의 강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지금부터 방언에 대해서 김성곤 목사가 가르쳤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반드시 바르게 이해해야 할 성경의 참 방언에 대해서 살펴 보자.

김성곤 목사의 가르침 1>

“방언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외적 증거이시다.”
“성령세례의 현장에서 방언이 터진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의 육체에 나타나는 증거이다.”

김성곤 목사는 기독교의 방언이 성령이 임하시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 즉 성령세례의 징조라고 가르쳤다. 이는 결국 거짓된 방언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성령도 모시지 못한 무능한 사람이라는 간교하고 무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만들어 내지 않는 진짜 거짓 방언은 귀신이 임하여 장난하는 사람의 육체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참 성령의 방언은 성령의 임재의 징조로 나타난 적이 없다. 사도행전에 그 많은 성령의 임재 현상과 역사하심이 기록되어 있으나, 성경의 방언이 더불어서 타나난 경우는 불과 세번이었다. 2장의 최초의 방언 현장, 10장의 고넬료 가정, 19장의 에베소 교회에서만 방언이 나타났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일지라도 방언이 더불어 나타나지 않았던 사례들은 이보다 더욱 더 많다.

1)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 집사에게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을 때(행 8장),
2)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를 통하여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을 때(행 8장),
3)예수님을 대적했던 청년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질 때(행 9장),
4)중풍병자 애니아에게 성령이 임하여 치유되었을 때(행 9장),
5)죽었던 여 제가 다비다에게 성령이 임하여 다시 살아났을 때(행 9장),
6)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신자들(행 13장),
7)바울의 전도로 구원받고 치유받은 이고니온의 앉은뱅이(행 14장),
8)빌립보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은 믿은 루디아와 그 가족들(행 16장),
9)억울하게 투옥되었던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고 영생을 얻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행 16장),
10)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새신자를 보았던 고린도 지역(행 18장)

위의 사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방언이 나타났다고 설명되지 않는 사도행전의 사례들이다. 어느 성경에서도 기독교의 방언이 성령이 임하심의 육체적인 징조로 나타났다고 볼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위의 사도행전의 사례들 가운데 기독교의 방언을 말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성령의 방언을 말한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김성곤 목사의 방언 주장대로 성경의 방언이 성령받은 신자에게 성령임재의 외적인(육체적인) 증거로 나타난다면 이렇게 많은 성령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례들 가운데 왜 방언이 더불어 동시에 나타났다는 내용이 한 번도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방언은 결코 어떤 신자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나타난 적이 없다. 초대교회의 방언은 그런 방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방언은 왜 나타났던 것일까? 초대교회의 방언은 무슨 목적으로 믿는 신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일까? 성령이 신자들에게 방언을 주신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중의 하나는 참 방언이 실제로 나타난 시대를 비교적 가깝게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초대교회 중요 인물들의 방언 이해

오늘 날에는 방언이라고 불리우는 소리현상이 매우 흔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성령의 역사가 가장 많이 기록된 사도행전에도 방언은 불과 세 곳에서 등장한다. 사도들이 활동했던 시대가 지나고 난 후 기독교의 방언이 여전히 나타났음을 암시하는 그 어떤 교회사적인 기록물도 아직 보고되고 있지 않다.

50년대 중반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12장의 성령의 은사의 목록에는 방언과 방언통역이 있으나, 조금 후에 기록된 로마서 12장의 은사의 목록에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가 없다. 왜 그럴까? 이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는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는 그 당시에만 필요했던 특수하고 한시적인 은사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그 이후 방언과 방언통역이 교회에 여전히 나타났다고 짐작하게 만드는 믿을만한 자료들에 대해서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다.

초대교회의 실제상황에서 기독교의 방언의 은사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초기의 정보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과 인연이 있었다고 알려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변증가 이레니우스(Irenaeus,130-202)가 남긴 저술 <이단에 대항하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가 방언에 대해서 남긴 말은 고작해야 교회에 이전에 실제하였던 방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다.

이레니우스의 글에는 그 자신이 기독교의 방언을 사모했거나, 주변의 신자들이 방언을 말한고 있다는 내용은 없고 단지 이전에 존재하였던 방언을 말하는 은사에 대해서 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분위기로 보아 이레니우스 당시에는 이미 성경의 방언이 사라졌던 것 같다. 성경이 완성되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어 세워지는 신약의 교회가 확립되고 난 후 사명을 다한 기독교의 방언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사에서 거짓 방언의 시초로 지목되는 사람은 몬타누스(Montanus)이다. 몬타누스는 자신이 새 예루살렘의 선지자이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가 자신을 통해 부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성령이 자신을 통해 예언을 주신하고 하면서 성경의 방언과는 다른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을 선보였다. 몬타누스는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그의 방언 또한 기독교의 방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몬타누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이레니우스가 몬타누스를 통해 나타나는 방언 등의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독교의 방언이 이미 그 이전에사명을 다 감당하고 사라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도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면서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성경의 방언은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고, 그 당시이미 교회에서 사라졌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경의 방언에 대하여 가장 많은 가르침을 남긴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계승하여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발판이 된 스승이라고 평가되는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도 고린도전서를 강해할 때 실제 외국어였고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메시지가 되었던 성경의 방언이 사라졌고 그 당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방언이 나타난 초기의 교회와 비교적 가까웠던 믿을만한 사람들의 방언에 대한 증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래전에 방언이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의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에 관해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언을 더 이상 교회에 보내시지 않았으므로 방언이 이미 사라졌고 더 이상 경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기독교의 방언이 어떻게 믿는 이방인에 관해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일까?


사도 바울이 밝히는 기독교의 방언의 의미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4:21-22절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거짓 방언에 빠진 신자들이 많았던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성경의 참 방언의 의미를 정확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1,22)

바울이 ‘율법에 기록된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다음의 내용의 출처가 구약성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 이 부분이 어떤 구약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 부분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 인용되었을까?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의 내용을 여기에다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 28:11)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시대의 유대 백성들에게 외국 군대를 보내어 철저하게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저주성 예언을 주시는 장면이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알아듣기 좋은 말로 해도 고집부리며 하나님을 대적하니,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하는 외국 군대를 보내서 철저하게 죄악을 응징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저주성 예언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유대 백성들에게 주셨다.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렘 5:15)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선지자들이 알아들기 좋은 좋은 말로 가르쳐도 계속 고집부리고 악독하게 행동하므로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말을 사용하는 다른 나라의 군대를 보내어 혹독하게 심판하시겠다고 대표적인 두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다. 역사를 보면 유대 왕국이 패망할 무렵 두 나라가 침략했다. 먼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산헤립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서 유대 백성들에게 순순히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때 유대 왕국의 높은 관리들은 산헤립 군대에게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사 36:11)라고 간청하였다. 산헤립 군대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방언을 유대 백성들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두 선지자를 통해 유대 백성들이 전혀 모르는 낯선 방언을 사용하는 포악한 군대가 하나님의 작정한 심판을 유대 왕국에 이룰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유대 백성들이 대략 아는 방언을 사용하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군대는 유대 왕국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아닌 것이다. 얼마 후 유대 왕국을 침략한 산헤립의 군대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거의 전멸에 이를 정도의 피해를 보고 달아났다.

하나님이 유대 왕국을 심판하시기 위해 준비한 군대는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다시 강대국으로 등장한 바벨론의 군대였다. 바벨론의 언어와 유대 백성들이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었다. 바벨론 병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대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되어 끌려감으로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의 저주성 예언은 이렇게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구약의 이런 비극적인 역사와 신약의 성령의 방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도 바울은 신약의 초기에 잠시 나타났던 기독교의 방언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왜 인용하였을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고집부리는 당시의 유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또 다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저하면서 죄악을 일삼는 그 이전의 유대 백성들과 유대 왕국을 전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외국 군대를 통해 응징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부하고 죽인 유대 백성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그들 대신에 순순히 복음을 믿는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하나님의 다른 형태의 심핀의 메시지라는 뜻이다. 

만일 뉴욕에서 모이는 UN 총회가 한국어를 공식회의의 언어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그것은 단순히 한국말이 UN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 한국 민족의 위상이 세계 중심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뜻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세계인들이 우리 나라를 우습게 안다면 어찌 우리 말을 UN 총회의 공식 언어로 사용하자고 결의하겠는가?

바로 이 같은 차원에서 이방인의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설명하는 기독교의 방언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는 큰 은혜의 복음을 이방인들의 언어로 설명하는 방언 현상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단순히 이방인들의 언어를 하나님이 복음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작한 자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은혜받은 자들이 연합하여 신약의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동시에 유대인이라 자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내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버려졌고,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착한 이방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기하고 분을 내라는 하나님의 응징이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방언의 의미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성경의 방언을 다시 살펴보면 모든 것이 백일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최초로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유대인 제자들이 살면서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여러 이방인 지역의 언어들이었다.
 
2)두번째로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집의 방언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도 믿음으로 성령받아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구별이 없게 만들었다.

3)세번째로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의 방언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주변의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큰 경고와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의 하나님의 큰 역사를 말하는 이방인 언어의 방언은 이방인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선포했고, 또한 불신 유대인들에게는 빼앗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분과 시기가 일어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4)바울이 에베소 교회보다 조금 일찍 개척했던 고린도 교회에서도 거짓 방언 이전에 참된 방언이 나타났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방인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설명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교만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믿음의 시기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보게되는 이유는 바울이 복음을 강하게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회당 옆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회당장 그리스보가 믿고 세례를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고(행18:7,8), 그 다음 회당장 소스데네 또한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으며(행 18:17), 고린도전서 1장 1절에는 소스데네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꾼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방인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설명하는 초대교회의 방언이 유대인들에게 버리워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을 알리어 충격을 주었고, 또한 택하신 유대인들이 더 빨리 믿음으로 돌아오게 만들도록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방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기독교의 방언은 그 시대의 실제 이방인들의 언어였다.

2)기독교의 방언은 뜻을 내포한 언어였으므로 자연적 통역 또는 성령의 통역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에 대한 보충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3)방언이 통역과 함께 시행됨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예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4)방언의 주목적이 이방인들의 변화된 영적위상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방언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이라는 말씀을 곧 방언을 듣고 보면서 깨달아야 할 사람이 교만한 유대인들이라는 의미이다.

5)방언이 이방인의 언어로 십자가의 큰 은혜를 설명하는 은사였으므로 통역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6)성경완성으로 계시가 종결되고, 오직 십자가만이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되게하는 최종적 구원계시임이 다 알려진 후에는 더 이상의 유대인에게 믿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개우치는 방언이 있을 필요하지 않다. 

7)기독교에서 개인이 하나님께 비밀스러운 언어로 기도한다는 방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방언의 역사는 곧 이단 교회사와 일치한다.(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 뒷 배경을 보아 김성공 목사가 일본에서 두날개 컨퍼런스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김성곤 목사가 두날개의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 기독교의 방언을 신자에게 성령의 임재하심의 외적인, 육체적인 증거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정말 한심스럽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을 듣고서 아무 의미도없는 거짓된 옹알거리는 소리가 성령의 임재하심의 증거라고 믿고 좋아하면서, 신령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면서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신자들을 김성곤 목사는 어찌 책임질 것인가? 

김성곤 목사가 가르친 성령의 임하심의 외적인(육체적인) 증거로서의 방언은 처음부터 기독교에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거짓 소리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나타난 이단들에 의해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를 다시 회복한다는 거짓 종말운동과 함께 나타났고, 자신들을 통해 재현되는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의 핵심적 징조로 도입되었다. 그 자신들이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방언과 동일한 성령의 방언이니 외국에 가서 선교하기 위해 외국 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외국에 가서 실험하는 사람들에 의해 아무 의미없는 옹알거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실제 외국어가 아니고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다시 둔갑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김성곤 목사의 가르침들을 보면, 어떻게 이런 신학을 가진 분이 개혁주의 교단의 목사이고, 부산에서 소문난 큰 교회를 만들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100여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두날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스타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나라는 누구든지 교회를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깔아뭉개면서 성공하기에 아주 좋은 나라인 모양이다. 진즉 두날개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났어야 했다. 오늘 다룬 내용은 방언에 대한 김성곤 목사가 신자들에게 가르친 내용 중에서 극히 일부이다. 다음에 더 많은 남은 내용을 살펴보고, 이어서 계속 김성곤 목사가 '리더수양회'에서 가르친 내용들을 살펴볼 것이다.